그리고 지금 묵는 연길의 시상여관 근처에는 소학교가 하나 있고, 실개천이 가까이 있으며, 그 외에는 딱히 뭐 하나 없다. 주말 밤에도 이 도시는 적막하기 그지없다.
조선족자치구에 가 보고 싶다는 마음은 하얼빈에서부터 들었는데,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떤 나의 동류를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하얼빈에서 떠듬떠듬 중국어를 지껄이는 나를 신기해하며 자꾸만 말을 걸던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의 감이라도 잡으려면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했는데 그러기를 몇 밤, 그저 타지의 이질감에 너무 빨리 지쳐버렸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연길, 애잔하다. 19세기 중반 수년 간에 걸친 지독한 기근에 두만강을 넘어 온 사람들. 윤동주가 다니던 중학교를 찾아 갔을 때 길을 몰라 지긋하신 분들에게 길을 물었다. 한 할머니는 내게 "조선 사람이야?"라고 묻는다.
말하자면 '조선'이 '우리네'를 묵는 기준이다. 그 말은 한국도 북한, 간도, 어쩌면 까레이스키까지, '조선'이 부서진 조각 중 하나라는 것이다. 마치 북한은 사회주의의 변태적 소산이고 조선족은 이미 중국화 되어 '오염된' 회색의 문화이며, 때문에 '자유민주주의'가 가능한 한국만이 인간의 존엄을 보장하는 한국 사람의 진정한 국가라는 생각; 뭐 어찌 생각하든 다 좋은데, '한국은 한국'일 뿐이다. 그렇게 보자면 한국 또한 역사상 가장 변태적 이념인 자본주의에 꽤나 오염되고 조선 문화의 (뒤틀린) 변형 중 하나일 뿐이다.
이 곳은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의 인구가 거의 없다시피 하다. 이제 스무살이나 되어 보이는 아이들은 무료해 보였다. 그들은 설픈 화장과 어색한 옷차림을 하고 한국에서 온 DJ가 원더걸스를 트는 나이트엘 간다. DJ는 한참 노래를 틀다가 '놀아보자며' DJ박스에서 나와 끝장나게 춤을 추기 시작한다. 저 DJ가 어떻게 이 곳에 오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마 지방 나이트에서 파장 때에만 노래를 틀다 메인으로 써주는데다 보수도 좀 더 낫다는 제안에 오게 되었을지도. 저 DJ는 한국에서 '파장 시간대'에 노래를 틀다 마감한 뒤, 해가 다 뜬 아침에 들른 김밥천국에서 먹은 떡라면은 어쩌면 이 곳을 떠난 아줌마가 끓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아줌마의 딸은 이 나이트에서 흔들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저 아이 또한, 이 곳을 떠나지 못해 흔든다.
아이들은 킬힐을 신고 한국 드라마를 본다. 그럼에도 그들은 어서 중국의 다른 큰 도시로 가고 싶어한다. 모든 간판과 표지판이 중국어와 조선말로 병기되어 있는 것처럼, 이 곳은 화려한 한국의 문화와 자신들이 속한 중국의 현실 안에서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나의 고향을 생각한다. 이들의 동경, 하지만 내가 아는 실제 한국의 삶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얼마 전 사 본 중국 신문에서 6월까지만도 232명이 서울 한강에 스스로를 던졌다는 기사를 봤다. 그 곳의 압박, 차별, 스트레스, 그리고 시선의 감옥.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곳을, 이 사람들을 응원하고 싶다. 디아스포라는 슬프지만 아름답다. 이 곳에서 나고자라 평양, 서울, 도쿄를 거쳐 후쿠오카에서 거진 내 나이에 옥사한 윤동주가 쓴 이 몇 구절은 나를 그저 울게 만든다.
고향집 - 만주에서 부른
헌 짚신짝 끄을고
나 여기 왜 왔노
두만강을 건너서
쓸쓸한 이 땅에
남쪽 하늘 저 밑에
따뜻한 내 고향
내 어머니 계신 곳
그리운 고향집
leaf